보물 999호 희랑조사 진영상
선종의 등장으로 스님들의 위상이 높아지다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며, 그 마음을 읽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붓다의 가르침을 불교라 하고, 그 가르침을 종지(宗旨)로 한 것이 교종(敎宗)이다.
석가모니 붓다는 입으로가 아닌 빛으로 말씀을 전하였는데, 우리는 이를
광명설법(光明說法)이라고 한다. 불상의 광배는 이 광명설법의 조형적인 표현이다.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 후, 제자들은 몇 번에 걸쳐 모임[결집(結集)]을 갖고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가르침을 모았다. 이를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하는 것은 큰
대나무 소쿠리[대장(大藏)]에다가 가르침의 내용을 적어서 담아 두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장경의 내용은 제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석가모니 붓다의 말씀으로,
경전의 첫머리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뜻의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것은 다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경전의 문구를 하나하나 읽어나가던 스님들은
행간(行間) 속에 담겨 있는 붓다의 마음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붓다의 말씀을 새기는 교종과 달리, 붓다의 마음을 공부하는 선종(禪宗)이 생긴 것이다. 즉 붓다의 마음을 읽고 붓다와 같이 깨달음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석가모니 붓다를 대신하던 불상은 점점 그 존재감을 잃게 되었다. 오히려 붓다의 마음을 읽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스님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8세기 후반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던 많은 승려들은 붓다의 가르침보다 마음을 읽는
공부를 하고 돌아 왔다. 이제 신도들은 석가모니 붓다의 말씀인 경전만큼
선승(禪僧)들의 어록에 귀를 기울였다. 스님들은 석가모니 붓다의 제자로서만이 아니라 신도들의 예배 대상으로서 여겨졌다. 그들이 입적한 후에는 불탑(석가모니 붓다의
납골당)과 비견될 정도의 화려한 부도(浮屠, 붓다에 어원을 둠)를 만들어 승사리(僧舍利, 다비 후, 스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봉안하거나 조사당을 건립하여 영정을 모셨다.
심지어 입적한 스님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승려의 진영상(眞影像)을 만들기도 하였다. 해인사에도 스님의 진영상이 하나 전해 내려온다, 희랑조사상이 그것이다.
해인사의 4대 주지, 희랑조사
해인사 큰 법당에서 왼쪽 오솔길을 따라 능선을 돌아가면 희랑대(希朗臺)가 나온다.
희랑대는 신라말 고려초에 활동했던 희랑조사(889-967)가 수행하던 곳이다. 고려시대
균여(均如)의 [균여전]에서는 화엄종을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으로 구분하고,
화엄사(華嚴寺)를 중심으로 하는 관혜(觀惠)스님의 가문을 남악에, 해인사를 거점으로
하는 희랑스님의 가문을 북악에 비정하였다. 또한 관혜스님을 견훤(甄萱)의 복전(福田,
공양하고 선행을 쌓아서 내세에 복을 이루려는 것)에, 희랑스님을 태조 왕건(王建)의
복전이라고 하였다. 희랑스님이 신라 말기에 출생하여 고려 초기에 활동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균여의 기록은 거의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해인사 희랑대
[신라가야산해인사고적(新羅伽倻山海印寺古籍)]에는 희랑조사와 왕건의 친밀한
관계를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즉 927년, 신라의 왕도인 경주를 유린하고 돌아오던
견훤과 왕건이 해인사 부근인 미숭산(美崇山)에서 대치하였고, 이 때 위기에 처한
왕건을 희랑조사가 구해 주었다는 것이다. [신라가야산해인사고적]이 후대에 찬술된
것인 만큼, 약간 과장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왕건과 희랑조사와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희랑조사의 입지는 더욱더 높아졌으며, 신라 말부터 있어왔던
남악파와의 갈등도 종식되기에 이른다. 930년경에 해인사에서 이루어졌던 대규모의
중창 불사(佛事)는 왕건의 후원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해인사의 4대 주지였던 희랑조사는 15세이던 904년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다.
왕건과의 관계를 통하여 20여년이 지난 930년경이 되면, 해인사에서 그는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사전(寺傳)]에는 그를 흉혈국인(胸穴國人)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실제
그의 가슴에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재미있는 사실은 해인사의 희랑조사
진영상에도 가슴 중앙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는 것이다.
진영상이 희랑조사의 참모습이라면, 그는 아마 이러한 외모를 지녔을 것이다. 작지
않는 키, 마른 몸, 주름진 얼굴, 커다란 코, 약간 앞으로 웅크린 자세, 유난히 솟아나온
정수리… 정말 범상치 않는 노스님의 모습이다. 삼라만상의 물리를 이미 깨우친 듯
체관(體觀)의 경지에 이른 노스님의 연륜과 경륜이 물씬 묻어나오는 듯하다.
희랑조사 진영상 얼굴 부분
사실 희랑조사 진영상을 얼핏 본 사람이라면, 살색의 얼굴 빛과 붉은색과 푸른색의
화려한 장삼만이 기억 속에 들어온다. 그러한 잔상들로 인해 우리는 희랑조사의 진면목을 간과하기 쉽다. 조선시대 17세기에 기록된 희랑조사 진영상은 온통 검은 색이었다.
아마 옷칠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위에다 채색을
입혔던 모양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조각과 채색이 전혀 유기적이지가 않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채색을 위한 채색을 한 듯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고의 초상 조각인 희랑조사 진영상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당연히 처음 보는 기법이다. 바닥부분과 뒷부분은 진영상을 안정적으로 고정하기
위하여 나무로 만들었고, 앞면과 옆면 등 나머지 부분은 여러 재료가 혼합된 흙으로
조성되었다. 이런 기법이 고려시대 초기의 제작 방법이었을까?
비교 대상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희랑조사가 생존했던 930년경에 이 상을 직접 감독하여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때는 희랑조사가 겨우 40세 전후의 나이였다. 진영상에 보이는
달관한 모습의 노스님과는 전혀 그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 오히려 말년의 모습이라면
모를까?
희랑조사 진영상에서 우리는 석가모니 붓다의 마음을 읽기 위하여 희랑대에서 매일
수행하였던 희랑조사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비록 그가 붓다의 어떤 마음을
공부하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글: 배재호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하버드대학 방문학자, 대통령실 정책자문위원(문화재),
용인대학교 문화재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당대불교조각](2003), [중국의 불상](2005),
[동양미술사](2006, 공저), [세상은 연꽃 속에](2006), [연화장세계의 도상학](2009)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