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판 보살상
금동판 불상
전성기 신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안압지
“신라 문무왕 14년(674) 2월, 왕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는데, 무산(巫山,
중국 쓰촨성에 있는 산) 열두 봉우리를 형상화하였으며, 꽃을 심고 진귀한 새를 길렀다. 그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다. 지금은 연못을 안압지라고 말하는데, 경주 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다”
안정복(安鼎福)이 조선시대 정조 2년(1778)에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보이는 안압지에 관한 기록이다. 그 내용은 [삼국사기]를 기초로 하였다. 원래 이곳은 월성의 연못이었기 때문에 월지(月池)라고 하였으나,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것을 본 조선시대의 시인 묵객들에 의해 안압지로 불리게 된 것이다.
[동사강목]에 기록된 무산의 열두 봉우리는 안압지가 도가(道家)적인 배경 속에서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실제로 안압지에는 도교의 삼신산(三神山)인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州山), 방장산(方丈山)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과 무산 열두 봉우리를 의미하는 크고 작은 구릉이 월궁 동서쪽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즉 안압지에는 불노초(不老草)가 자란다는 삼신산과 초(楚)나라 양왕(襄王)이 꿈속에서 선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무산 12봉이 조성되어 있다.
1970년대 중반, 안압지가 발굴되면서 조선시대 묵객들의 시상(詩想)의 대상이 되곤 하였던 이곳이 전성기 신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인 보고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우거진 잡풀들을 걷어 내고 무너진 제방을 다시 정비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웅장한 건물터와 아름다운 조경, 땅속에 묻히거나 물속에 잠겨 있던 3만 3천여 점의 유물들은 막 통일의 꿈을 이룬 신라의 모습 전체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삼국사기] 등 여러 문헌들은 동궁(東宮, 태자가 기거한 곳)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하여 674년부터 만들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효소왕(孝昭王) 6년(697) 9월, 왕이 월궁의 가장 중요한 전각인 임해전(臨海殿)으로 군신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 내용은 늦어도 이 무렵엔 월궁과 안압지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안압지 전경
놀랍도록 섬세하고 사실적인 불상
동아시아 삼국의 정원은 대부분 도가적인 배경 속에서 설계되었다. 월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이곳이 도교와 같은 종교적인 공간은 아니다. 그저 왕궁이다. 발굴 결과, 건물터와 그것으로부터 멀지 않는 연못에서 많은 불상들이 발견되었다. 신라의 왕실이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사기]에는 동궁에 승방전(僧房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굴된 불상들은 내불당(內佛堂, 왕궁 안에 있는 불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승방전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불감제일(佛龕第一)”이라고 조각된 칠판(漆板)은 적어도 2개 이상의 불감이 마치 사당에서 위패를 모시듯이 배열되었던 승방전 내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비록 불감의 형태를 짐작할 수는 없으나, 칠판으로 미루어보아 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불상 중에서는 이들 불감 속에 부착하거나 고정시켰을 만한 것으로 금동판 불상들이 있다.
금동판 불상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형식이다. 불삼존상이 표현된 2개의 금동판에는 판을 세우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밑 부분의 촉이 남아 있으며, 광배 가장 자리에도 금동판을 고정하기 위한 못 구멍이 나 있다. 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4개의 금동판에는 가장자리에 못 구멍은 없지만 밑부분 양쪽에 촉은 만들어져 있다. 사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판들이 어떤 방법으로 봉안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불삼존상의 금동판 2개는 크기가 같지만, 보살상의 금동판 4개는 크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원래는 훨씬 많은 수의 금동판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략 불감의 정면 중앙에 불삼존상의 금동판이 있고, 그 옆으로 합장한 보살상의 금동판이 놓여 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금동판이 주조된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섬세하고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7세기 중반의 신라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불상에서는 적절한 신체 비례와 원만한 상호, 온화한 미소, 신체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된 크고 작은 옷주름들, 손가락과 발가락의 미세한 움직임 등을 살필 수 있다. 한편 보살상에서는 팔등신에 가까운 늘씬한 모습과 관능적인 자세, 유려하게 표현된 천의 자락 등을 볼 수 있다.
금동판 보살상
금동판 불상
그런데 연화좌에 가부좌(跏趺坐)를 하고서 설법하고 있는 불상이 어딘지 모르게 우리에게는 전혀 낯설지가 않은 모습이다. 그렇다. 국사 교과서에서 많이 봤던 고구려 화가 담징(曇徵)이 그렸다는 일본의 호류지[法隆寺] 금당 벽화와 닮았다. 물론 지금 호류지 금당 벽화가 담징이 직접 그렸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금동판 불상의 도상이 호류지 금당의 서벽에 그려진 아미타정토도와 유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불삼존상으로 구성된 금동판 불상이 호류지 금당의 아미타정토도에서와 같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신라는 신문왕(神文王) 9년(689)에 일본 천황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금동아미타불상과 금동관세음보살상, 금동대세지보살상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문무왕(文武王, 661-681재위) 때의 일을 기록한 [삼국유사] ‘광덕엄장(廣德嚴莊)’에서는 서방정토왕생(西方淨土往生)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안압지가 조성되던 7세기 후반에 신라에서 죽은 사람을 추선하기 위하여 아미타신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이들 금동판 불상도 승방전[내불당]의 감실에 봉안되어 선왕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데 사용된 것은 아닐까?
호류지 금당 아미타정토도
글: 배재호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하버드대학 방문학자, 대통령실 정책자문위원(문화재),
용인대학교 문화재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당대불교조각](2003), [중국의 불상](2005),
[동양미술사](2006, 공저), [세상은 연꽃 속에](2006), [연화장세계의 도상학](2009)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