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해남에 위치한 대흥사 북미름암 아래여래좌상. 10세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산꼭대기 위에 조성되어 특유의 경건함과 장엄함을 뽐낸다.
“천여 년 찬 비바람에 살결조차 헐드라”
문화의 전파는 마치 파도가 치듯이 밖으로 펼쳐진다. 파도가 시작된 곳이 가까울수록
그 모습과 성격은 비슷하지만 멀면 멀수록 모양도 성질도 흐트러지고 변해 버린다. 기념비적인 작품이 만들어진 후,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까운 모방작들은 모습과 성격이 거의 같지만, 그렇지 않을수록 새롭게 해석되거나
곡해되어 성격을 물론 모습까지 바뀌게 마련이다.
석굴암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불상이다. 석굴암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불교 도상들은
공간적으로 마치 파도가 펼쳐지듯이 처음에는 경주에서 유행하다가 경상북도까지 영역이 확대되고,
다시 전국적으로 그 영향이 미쳤다. 산꼭대기라는 석굴암의 독특한 지형적인 위치와 석굴이라는 독특한 봉안 방법,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는 불좌상 등 다양한 도상들이 이후 8세기 후반에 경주에서, 9세기에 경상북도에서,
10세기에 전국에 걸쳐 만들어졌다. 때로는 석굴 형식으로, 때로는 산꼭대기의 항마촉지인 불좌상이라는 형태로 조성되었다.
경상남도 사천의 다솔사(多率寺) 보안암(普安庵) 석굴에서 우리는 산꼭대기에 만든 석굴암의 석굴 형식을 볼 수가 있고,
팔공산 갓바위에서 항마촉지인 불좌상을 확인할 수 있다.
팔공산 갓바위 불좌상
|
석굴암 주존
|
석굴암이 미친 도상적인 영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당연히 산꼭대기에 항마촉지인 불좌상을 조성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주에서 가깝지 않은 전라남도 해남의 대흥사 북미륵암(北彌勒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 큰 바위 면에는 10세기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항마촉지인 불좌상이 있다.
대흥사에서 출발하여 작은 개울을 건너고 돌길을 따라 목에 숨이 찰 정도로 올라가면, 이 마애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노성대(老星臺) 오르는 길에 북암에 잠깐 쉬니, 암벽에 새긴 불상 솜씨도 기교한데, 천여 년 찬 비바람에 살결조차 헐드라”
백여 년 전, 대흥사와 암자들을 답사하고 지은 [대흥사송(大興寺頌)]이라는 시다. 누구든 불상을 본 사람이라면,
이 높은 곳이 이렇게 아름다운 불상을 조각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 요소들
마애여래좌상은 두륜봉(頭輪峰) 꼭대기의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공간에 맞게 적절하게 조각되었다.
암반은 가로 8m, 세로 6m나 된다. 정면 중앙에는 4.2m 크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통견식(通肩式, 양쪽 어깨들 덮고 있는 방식)으로 법의를 착용하고 연화좌 위에 가부좌를 결하고 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고부조의 상체와 저부조의 하체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마애불과 달리, 아래위 할 것 없이 동일한 모델링을 보여준다.
넓고 낮은 육계(肉髻)와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둥글고 부드럽게 처리된 어깨, 생동감 넘치는 대좌의 연꽃,
신체의 굴곡을 따라 유기적으로 처리된 법의 자락 등에서 불상을 정말 진흙이 아닌 바위에 새긴 것일까 착각할 정도다.
사실 불상이 지닌 종교적인 무게감을 표현하는데 화강암만한 재료가 없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불성(佛性, 불상의 상징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돌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화강암만큼 다루기 어려운 것도 없다.
경도가 강하고 입자가 굵어서 상호의 표정이나 섬세한 옷주름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장인의 관찰력은 물론 고도의 표현력이 요구된다. 화강암이 지닌 이러한 특성을 알고서 마애여래좌상을 보면,
당연히 최고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마애여래좌상의 앞에 설치되어 있던 전각에서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다.
상량문에 의하면, 전각은 조선시대 1554년에 처음 설치되어 1777년까지 여섯 번의 중수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마애여래좌상을 미륵불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불상을 둘러싸고 있는 천인(天人)들은 지금 막 하늘에서 내려온 듯 천의 자락이 위쪽으로 날리고 있으며,
광배 가장자리의 불꽃 역시 위쪽을 향하여 활활 타오르고 있다. 마치 불상과 천인상들이 하늘에서
두륜산 꼭대기로 지금 막 내려온 듯한 분위기다. 상량문에 보이듯이 도솔천(兜率天) 내원(內院)에서 막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미륵불과 같은 느낌이다.
마애여래좌상은 언제부터 미륵불상으로 불리웠을까? 이 암자를 북미륵암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마 불상을 미륵불로 생각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사실 불상이 조성되던 고려시대 초기에 이와 관련되는
명문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서 어떤 불상을 왜 만들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은 산꼭대기에 촉지인을 결한 불좌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처음 불상을 만들었을 때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는 있다. 산꼭대기에 조성된 촉지인 불좌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석굴암의 주존이 생각난다. 적어도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산꼭대기에 조성되었다는 것과 촉지인을 결하고 있다는
것은 석굴암 주존과의 연관 가능성을 부정할레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혹시 경주 토함산 정상에 원류를 둔
문화의 파도가 시공을 초월하여 전라남도 해남의 두륜봉 꼭대기까지 밀려왔던 것은 아닐까? 그 파도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떨어진 이곳에서 비록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였지만 성격은 바뀌어 미륵불이 된 것은 아닐까?
글: 배재호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하버드대학 방문학자, 대통령실 정책자문위원(문화재),
용인대학교 문화재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당대불교조각](2003), [중국의 불상](2005),
[동양미술사](2006, 공저), [세상은 연꽃 속에](2006), [연화장세계의 도상학](2009) 등이 있다.
자료: 제공문화재청헤리티지채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