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칼리스토(Kallisto 또는 Callisto)는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을 추종하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아르카디아(Arcadia)의 왕 리카온(Lykaon)의 딸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때로는 닉테우스(Nykteus) 혹은 케테우스(Keteus)의 딸로 기록되기도 한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칼리스토 역시 처녀신 아르테미스를 따라 순결을 맹세하고 함께 숲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신들의 제왕 제우스(Zeus)의 눈에 띠기 전까지 그녀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총애를 받는 전도유망한 님프였다.
아르테미스로 변신해 칼리스토에게 접근한 제우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ō)의 『변신이야기(Metamorphoses)』에 따르면 칼리스토의 운명이 달라지게 된 그날의 사건은 다음과 같았다. 하루는 제우스가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의 아들 파에톤(Phaethon)이 고집스레 태양 마차를 몰다가 모조리 태워버릴 뻔한 천궁과 지상 땅을 돌아보던 중이었다. 특히 그가 사랑하는 아르카디아에 들러 말라버린 강물과 샘을 채우고 황무지에 풀과 나무로 옷을 입히던 바로 그때, 한 처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니콜라스 베르헴, [칼리스토를 본 제우스], 1656년캔버스에 유채, 129x168cm, 개인 소장
그녀는 방금 사냥한 사슴과 토끼를 언덕에 내려놓고 화살통을 베개 삼아 잠시 기대어 쉬고 있었다. 피곤하고 지친 기색임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제우스는 흑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깊고 울창한 숲이니만큼 늘 자신을 감시하는 헤라(Hera)의 눈길이 닿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저리 아리따운 처녀라면 취하고 나서 나중에 아내의 잔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참을 만하다는 계산이었다. 제우스는 처녀가 절대 피하지 않을, 그녀가 섬기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모습으로 변신해 다가갔다. 칼리스토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여신의 뒤에 있는 독수리가 제우스의 신조임을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 장 밥티스트 포레스트, [제우스와 칼리스토], 1703년캔버스에 유채, 66x64cm, 마냉 미술관 소장
2 노엘 알,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칼리스토를 놀라게 한 제우스], 1754년캔버스에 유채, 90x99cm, 베르사이유와 트리아농 궁 소장
순결을 잃고 무리에서 쫓겨난 칼리스토
그러나 일이 되려면 어떻게든 되게 마련이다. 능청스럽게 칼리스토에게 접근한 제우스는 어렵지 않게 목적을 달성했고, 수치심과 모멸감에 당황한 님프는 그 장면을 목격한 숲을 볼 면목이 없어 활과 화살통도 버려둔 채 황급히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이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무리와 마주쳤지만 칼리스토는 이 역시 제우스가 변신한 것이라 여기고 도망쳐버릴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오비디우스가 기록한 『로마의 축제들(Fasti)』에는 일찍이 칼리스토가 여신의 활에 손을 얹고 처녀성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만일 여신이 칼리스토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된다면 추호의 용서도 자비도 없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티치아노, [다이아나와 칼리스토], 1560-65년 캔버스에 유채, 183x200 cm,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처녀인 아르테미스 여신은 칼리스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무려 아홉 달이 지나도록 눈치채지 못 했다. 그러나 발각은 시간문제였다. 마침내 어느 더운 여름날, 사냥을 마치고 더위에 지친 무리는 차가운 시냇물에 도착하자 여신의 제안에 따라 모두 멱을 감기로 했다. 지체 없이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다른 님프들과 달리 칼리스토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미 그녀의 죄를 알고 있었던 동료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옷을 벗겼다. 칼리스토의 불룩하게 솟아오른 배가 드러나고 여신은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함과 동시에 즉시 추방 명령을 내렸다.
폴 브릴, [칼리스토의 임신을 발견한 다이아나], 17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61x206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헤라의 저주로 곰이 된 칼리스토, 별이 되다
무리에서 쫓겨난 칼리스토는 곧 해산이 임박하여 아르카스(Arcas)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가 훗날 아르카디아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칼리스토가 아이를 낳자 이번에는 헤라가 복수의 칼을 휘두를 차례였다. 여신은 진작에 칼을 뽑아 들었지만 보다 적당한 때를 고르고 있던 참이었다. 아이까지 낳은 마당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헤라는 오비디우스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칼리스토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 굴렸다. 칼리스토는 두 팔을 벌려 헤라에게 빌기 시작했는데 이미 저주로 그녀의 몸은 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거친 털과 뾰족한 발톱이 돋고 목소리는 거친 짐승의 소리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마음만은 여전히 여린 인간의 그것이어서 숲 속을 헤매다 작은 산짐승이나 사냥개를 만나면 겁에 질려 달아나기 일쑤였다.
멜돌라, [사냥하는 아르카스], 1550년경 유화, 캔버스에 유채, 18.8cmx18.4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칼리스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곰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란 아르카스가 15살 되던 해,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칼리스토와 만나게 된 것이다. 운명적인 이들의 만남은 비극이 될 찰나였다. 사무치게 그리운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칼리스토를 향해 아르카스는 창을 날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던 제우스가 돌개바람을 시켜 모자(母子)를 하늘로 올려주었으며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라는 두 개의 별자리로 만들어 참극을 방지하였다.
헤라는 노발대발했다. 제우스가 그녀의 복수를 번번이 우습게 만든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바람피우다 걸린 이오(Io)를 별로 만들어 준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혼외 자식까지 챙기는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그래서 헤라는 자신을 키워준 양부모이기도 한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Oceanos)와 그의 아내 테티스(Tethys) 여신을 찾아가 구구절절 하소연을 했다. 내용인즉 칼리스토와 아르카스가 변한 두 개의 별자리가 절대로 대양의 맑은 물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없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두 바다의 신은 헤라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보다 가까운 미술사,
소통하는 미술사에 대해 고민하며 집필 및 강의 활동을 겸하고 있다.
사실 헤라가 결혼과 출산을 주관하며 일부일처제를 옹호하는 가정의 수호신임을 감안할 때, 그녀의 분노는 타당하다. 다만 그 화살이 제우스가 아닌 상대 여인들과 그 자식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는 신화적 서사가 관습의 산물이며 지배계급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는 해석적 입장을 상기시킨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칼리스토에 관한 일화에서 정작 칼리스토는 찾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