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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카디아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한 지역의 이름이다.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지금도 양들의 방목지로 유명한데,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os)에 따르면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은 양과 염소를 치며 천혜의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산다고 기록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Zeus)와 칼리스토(Callisto)의 아들 ‘아르카스(Arkas)’에서 그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전설상으로는 헤르메스(Hermes)가 태어난 곳이자 그의 아들인 목신(牧神) ‘판(Pan)’이 다스리던 영역이라고도 전한다. 서양미술사에서 이곳 아르카디아가 작품의 주제로 자주 등장하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주의에 매료된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대자연의 풍요로움이 가득한 유토피아로 묘사된 아르카디아. 미술 작품들을 통해 만나보도록 하자. |
| 축복과 풍요의 낙원, 아르카디아 |
| 속세를 벗어난 이상향에 대한 꿈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동양에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다면 서양에는 아르카디아(Arcadia)가 있다. 그러나 아르카디아가 원래부터 이상적인 축복의 땅으로 여겨진 것은 아니었다. 상상 속에서나 있는 무릉도원과는 달리 아르카디아는 실제 고대 그리스 중부의 초원 지대로 목축을 생업으로 하는 고립된 지역이었다. 기원전 2세기 경의 로마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는 자신의 고향 아르카디아에 대해 목신 ‘판’을 숭상하며 사람들이 노래를 즐기고 매년 음악 경연을 한다는 사실 이외에는 내세울 것 없는 척박한 땅으로 기록했다. 이렇듯 이상향과는 거리가 먼 실제의 아르카디아를 축복과 풍요의 낙원으로 처음 묘사한 사람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였다 |
니콜라 푸생 [판의 승리] 1634~1636년, 캔버스에 유채, 138 x 157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그리스 신화 가운데 ‘판’은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나 목축과 농경을 관장하는 목신이 되었다. 머리와 몸은 인간의 형상이지만 뿔과 뾰족한 귀, 그리고 염소 다리를 가진 반인반수의 신이다. 푸생은 베르길리우스의 목가시에서 영향 받아 아르카디아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판과 님프, 인간, 사티로스들이 한바탕 술과 음악의 축제를 벌이는 모습을 그렸다. |
| 폴리비우스의 기록에서 영감을 얻은 베르길리우스는 아르카디아를 자신의 목가시를 위한 이상향으로 재창조해냈다. 그의 [목가집(Bucolica seu Eclogae)]에서 아르카디아인들은 인생과 사랑에 관한 시와 노래를 지으며 풍요의 땅에서 평화롭게 양을 치는 목동들로 그려졌다. 아르카디아의 아름다운 대자연에서 목동들은 소박한 삶에 만족하고 질투와 시기가 아닌 우애와 사랑을 다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삶의 원류인 자연과 조화롭게 공생하며 행복을 누린다. |
지오르지오네 or 티치아노 베첼리오 [전원의 합주] 1508~1509년, 캔버스에 유채, 110 x 138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그림의 화가가 지오르지오네(Giorgione)인지 그의 제자 티치아노(Tiziano Vecellio)인지에 대한 공방이 치열했던 작품이다. 화면 안에 묘사된 인물들에 관한 해석이 여전히 명확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옷을 벗은 두 여인은 현세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나머지 두 남성과 함께 류트와 플루트 연주회를 즐기고 있는 여신들이다. 화면 오른쪽으로 양떼를 몰고 있는 목동의 모습은 이곳이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사랑과 음악으로 조화를 이루는 이상향 아르카디아임을 암시하는 듯 하다. |
베르길리우스가 묘사한 아르카디아 목동들의 삶은 이후 줄곧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수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은 이러한 아르카디아를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의 강력한 예시로 삼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기존 신화의 이상공간에 등장하는 강의 님프들과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사티로스(Satyros)나 켄타우로스 (Kentauros)와 같은 이들이 추가되어 서구미술의 고전적인 주제로서의 아르카디아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가 그린 이상적인 낙원 아르카디아는 밝고 충만한 삶의 에너지만으로 채워진 곳이 아니다. 낙원에도 역시 좌절과 상실, 사랑과 절망, 그리고 죽음이 함께한다. 이는 동료 다프니스(Daphnis)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동들의 시와 노래 가사에 드러나 있다. 목동들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는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 목동의 죽음은 그가 속한 대자연의 슬픔과 절망 안에서 오히려 위로 받을 수 있다고 노래한다.
1 루벤스 [판과 시링크스] 1617~1619년, 패널에 유채, 40 x 61 cm, 카셀 국립미술관, 카셀
이 작품은 플랑드르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가 인물들을, 브뤼겔(Jan Brueghel the Elder)이 풍경과 동물 묘사를 맡아 공동 작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화에서 아르카디아의 목신 판은 색욕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자연의 정령인 님프 시링크스에게 반해 쫓아다니지만 시링크스는 판에게 잡히려는 찰나 갈대로 변해버린다. 망연자실한 판은 갈대를 다듬어 악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팬플루트(panflute 또는 팬파이프panpipe)’이다. 미술 작품들에서 판과 님프는 아름다운 자연 아르카디아를 배경으로 자주 다루어졌다.
2 아르놀트 뵈클린 [갈대 숲의 판] 1858년, 캔버스에 유채, 200x153 cm, 노이에 피나코텍, 뮌헨
갈대로 변해버린 시링크스를 애도하는 듯 어두운 갈대 숲에서 팬플루트를 불고 있는 판의 모습이 보인다. |
| 죽음마저 포용하는 자연과 삶의 궁극적 조화 |
구에르치노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1618~1622년
캔버스에 유채, 82 x 91cm, 국립고대미술관, 로마 |
| 아르카디아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 작품들로 17세기 이탈리아의 구에르치노(Goivanni Francesco Guercino)와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가 푸생(Nicolas Poussin)의 것을 꼽을 수 있다. 먼저 1618년에서 1622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에르치노의 작품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부터 살펴보자. 구에르치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오른편 하단 석상 위에 놓여진 해골이다. 해골에 달라붙은 파리와 갉아먹는 쥐는 죽음 뒤에도 여전히 진행중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왼편의 두 목자가 다소 놀란 듯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던 우리, 즉 관람자 역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해골이 놓인 석상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 “ET IN ARCADIA EGO(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이다. 여기서 ‘EGO(나)’는 누구인가? 관람자는 그것이 곧 죽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림 속 목동들처럼 자신들의 평온한 삶 가운데 무심코 끼어든 죽음의 존재와 그것의 경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깨닫게 된다. |
푸생 [아르카디아의 목동들] 1629~1630년,
캔버스에 유화, 101x82cm, 데본셔 공과 채즈워스 재단, 채즈워스 |
이 작품은 약 10여 년 뒤 그려진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동들](1629-30)에 참조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두 작품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구에르치노의 작품에서 뚜렷하게 제시된 해골과 관람자를 향한 명문과 달리 푸생의 작품에서는 관람자의 시선보다 높게 자리하여 눈에 잘 띄지 않는 해골과 직접 명문을 읽고 있는 목동들이 보인다. 여기에 흰 옷을 입은 여인과 아르카디아에 흐르는 알페우스(Alpheus) 강의 신으로 간주되는 노인이 새롭게 추가되어 신화적 성격의 역사화에 가깝게 그려졌다. 구에르치노의 작품에서 죽음이 작품 내 외부를 넘나드는 강력한 메시지였다면, 푸생의 것에서 그 메시지는 다소 약화된다.
푸생은 베르길리우스의 목가시에 감명받아 이를 원천으로 다수의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푸생의 인문주의적 성찰이 가장 두드러지는 그의 대표 작품은 [아르카디아의 목동들(또는 Et in Arcadia Ego)](1637~39)이다. 그렇다면, 수년 전 구에르치노 이후에 그린 [아르카디아의 목동들](1629~30)과 7~8년 후 같은 주제를 다룬 이 작품에는 과연 어떤 연관성과 차이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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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큰 차이는 더 이상 해골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요하고 어스름한 해질녘 풍경을 배경으로 세 목동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듯한 푸른 옷의 목동이 석관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새겨진 비문 “ET IN ARCADIA EGO”를 읽고 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사뭇 다른 차림새의 여인이 당당하게 서있다. 이질적인 분위기의 그녀는 이전 작품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에서 본 노인과 같은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푸생에게서 죽음은 관람자의 참여가 아닌 관조를 유도하며 그림 속의 평온한 아르카디아 풍경과 함께 목동들의 영역 안에 자리한다. |
푸생 [아르카디아의 목동들(또는 Et in Arcadia Ego)] 1637~1639년
캔버스에 유채, 185 x 121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 푸생을 통해 유명해진 문구 “ET IN ARCADIA EGO”와 더불어 아르카디아는 아름다운 대자연의 풍경과 이상향이라는 주제로 이후 서구의 문학과 예술 작품들 속에서 끊임없이 다루어졌다. 17~18세기 전원 풍경화에 이어 19세기 낭만주의 풍경화에서도 아르카디아는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그 예로 영국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허드슨 강 화파(Hudson River School)의 일원으로 활동한 토마스 콜(Thomas Cole)의 작품들과 미국 사실주의 화가 토마스 에이킨스(Thomas Eakins)의 작품 [아르카디아]를 들 수 있다. 에이킨스의 작품은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팬플루트를 불고 있는 누드 인물들을 그렸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아르카디아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사실적인 풍경 안에 묘사한 아이와 젊은 남자, 그리고 여인의 누드는 화가 자신의 아내와 조카의 사진에 기초하여 그린 비 이상화된 인물들이다. 이는 작품을 보다 확장된 맥락에서 이해하도록 요구한다. 콜과 에이킨스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은 전통적인 아르카디아 주제를 작가 고유의 시대적, 사회적 맥락 안으로 들여온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콜 [아르카디아의 황혼] 1843년
캔버스에 유채, 82.9 x 122.9cm, 워즈워스 아테네움 미술관, 하트포드 |
에이킨스 [아르카디아] 1883년경
캔버스에 유채, 134 x 202.9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 베르길리우스의 목가로부터 시작해 서구의 이상향으로 제시된 아르카디아. 그곳에서의 삶은 명예와 권력, 탐욕과 욕정에서 벗어나 자연이 베풀어준 그대로를 거두며 사는 삶이다. 희로애락의 인간사, 그리고 죽음마저도 아르카디아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일부다. 결국 유토피아라는 것은 더 없이 자연스러운 삶을 실현하는 것, 자연과 합치를 이루는 삶을 뜻하는 것인가. 더 이상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이들을 위해 오늘날의 예술 역시 아르카디아를 탐구한다. |
- 글
-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보다 가까운 미술사, 소통하는 미술사에 대해 고민하며 집필 및 강의 활동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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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루브르 박물관, 카셀 국립미술관, 노이에 피나코텍, 로마 국립고대미술관, 데본셔 공과 채즈워스 재단, 워즈워스 아테네움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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